아르메니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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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속주는 고대 로마 제국이 아르메니아 지역을 통치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아르메니아는 로마 공화국 시대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14년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속주의 무역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재위 초기에 아르메니아를 포기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사산 제국 사이에서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는 1세기에 아르메니아에 전파되었으며, 301년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주요 도시로는 아르타샤트, 아미다 등이 있었다.
아르탁시아드 왕조가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의 아르메니아 원정 이후 약화되면서,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에는 로마-파르티아 전쟁 과정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이 되었다. 이 시기 아르사케스 왕조 치하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로마 지지파, 파르티아 지지파, 또는 중립파로 나뉘어 복잡한 정치 상황을 보였다.
로마 속주 아르메니아 3세의 고대 주교 관구는 교황 연감에 명목 관구로 등재되어 있다.[16]
2. 역사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 그리고 그 후계 제국인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종속국 또는 봉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114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를 잠시 로마 속주로 편입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인 118년에 다시 종속 왕국 형태로 되돌아갔다. 이후에도 아르메니아는 두 강대국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왕위 계승 문제 등을 둘러싸고 잦은 분쟁을 겪었다. 로마는 종종 자국에 우호적인 인물을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려 시도했다.
새로운 강자인 사산 왕조가 등장한 이후에도 아르메니아는 로마(후의 동로마 제국)와 사산 제국 사이에서 중요한 완충 지대 역할을 했다. 비록 로마의 종속국 형태였지만, 아르메니아는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하며 사산 제국에 맞서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인 299년에는 다시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비잔틴-사산 전쟁 시기, 아르메니아는 결국 두 제국에 의해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387년경 체결된 아킬리세네 평화 조약을 통해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은 사산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서부의 일부 지역만이 동로마 제국의 통제하에 남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 지역은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적으로 제국 시스템에 통합되었으며,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시기에 대대적인 행정 개혁이 이루어져 기존의 자치권이 축소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가 강화되었다.
591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사산 제국의 호스로 2세 사이의 조약으로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으나, 이후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초기 무슬림 정복과 아르메니아의 아랍 정복이 시작되면서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은 아랍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동로마 제국은 서부 일부 지역만을 아르메니아콘 테마로 유지하게 되었다. 10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려 시도했고, 11세기 초에는 아르메니아의 상당 부분을 직접 통치하기도 했으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에 패배하면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한편, 종교적으로 아르메니아는 1세기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바르톨로메오와 유다 타대오 사도가 처음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4세기 초, 계몽자 그레고리의 노력으로 티리다테스 3세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국가가 되었다(전통적으로 301년). 이는 로마 제국이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 이전의 일이다. 기독교는 이후 아르메니아의 정체성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2. 1. 로마 공화국 시대
미트리다테스 전쟁 동안 로마 공화국이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아르타셰스 왕조가 다스리던 아르메니아 왕국은 기원전 66년에서 65년 사이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중반, 새롭게 부상하던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의 우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파견하여 전쟁을 벌였고, 이를 통해 로마의 우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했다.[1]
이 갈등은 란데이아 전투 이후 사실상 교착 상태에 빠졌고, 양측은 공식적인 타협에 이르렀다. 이 타협에 따라 앞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는 아르사케스 왕조 출신의 파르티아 왕자가 오르게 되었으나, 왕이 될 후보자는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2. 2. 로마 제국 시대
아르탁시아드 왕조가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의 아르메니아 원정 이후 멸망하면서,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로마-파르티아 전쟁 과정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제국 사이의 주요 분쟁 지역이 되었다. 이 시기 아르사케스 왕조 치하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로마 지지파, 파르티아 지지파, 또는 중립파로 나뉘어 복잡한 정치 상황을 보였다.
서기 1세기 중반, 파르티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로마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파견하여 군사 원정을 벌였고, 이를 통해 로마의 우위를 다시 확보했다.[1] 이 갈등은 란데이아 전투 이후 양측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타협안에 따라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조 출신 왕자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되,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도록 합의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종속국 또는 봉신의 지위를 유지하며 불안정한 평화를 이어갔다. 114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를 잠시 로마 속주로 편입했으나,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는 118년 이를 포기하고 다시 종속 왕국으로 되돌렸다. 아르메니아는 이후에도 로마와 파르티아(후에는 사산 제국)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결국 비잔틴-사산 전쟁 시기에는 비잔틴 아르메니아와 사산 아르메니아로 분할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2. 2. 1. 로마 속주 아르메니아 (114-118년)
파르티아 제국의 오스로에스 1세가 로마 제국과의 완충 지대였던 아르메니아 왕국에 괴뢰 군주 파르타마시리스를 세우자,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이를 모욕으로 간주했다.[17] 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동방 속주의 육로 및 해로 무역 독점에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여겼으며[18], 일부에서는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이해관계 충돌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트라야누스의 개인적인 명예욕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19], 이는 주류 의견은 아니다.[20] 현대에는 동방 속주 북부에서 파르티아의 영향력 확대를 막으려는 목적의 원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113년,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가 세운 아르메니아 왕을 몰아내기 위해 파르티아 침공을 결정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안티오케이아에서 편성한 원정군은 제3군단 갈리카, 제3군단 퀴레나이카, 제10군단 프레텐시스 등 3개 군단으로 시작하여 도중에 제4군단 스키티카, 제6군단 페라타, 제12군단 풀미나타, 제16군단 플라비아 피르마 등 주둔지 군단과 합류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국경 도시 사탈라에서는 도나우 강 방면 9개 군단에서 파견된 분견대까지 합류하여[23], 총 17개 군단, 약 8만 명 규모의 대군이 되었다.[24]
114년 봄, 트라야누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케이아에서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수도 아르탁사타를 정복했다. 이후 아르메니아 서부 도시 엘레게이아에서 파르타마시리스 왕을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속주로 편입한다고 선언했다.[25] 파르타마시리스는 로마로 호송되던 중 암살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아르메니아 전역 제압을 명령했고, 114년 말까지 주요 거점들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흑해 부근 세력들과의 교섭 및 조정도 이루어졌다.[26]
: 안티오케이아에서 황제(트라야누스)는 유프라테스강을 거쳐 레서 아르메니아의 최북단 군단 주둔지인 사탈라까지 진군한 후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아르탁사타 방면으로 향했다... 트라야누스는 이 속국을 속주로 만들 결심을 굳혔으며, (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을 일반적으로 옮기려 했다... 아르메니아는 운명에 굴복하여 로마 총독령이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그 후 진군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처럼 메소포타미아도 로마 속주가 되었다.
새롭게 편입된 아르메니아 속주는 동쪽으로 카스피해 연안까지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로마의 속국인 이베리아와 알바니아와 국경을 맞대었다. 아르메니아 속주는 카파도키아와 함께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의 카틸리우스 세베루스가 총독으로 다스렸다. 로마 원로원은 이를 기념하여 "ARMENIA ET MESOPOTAMIA IN POTESTATEM P.R. REDACTAE"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가 로마 인민의 권력 아래 들어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며 아르메니아의 속주 편입을 공식화했다.[2]
그러나 로마의 지배는 순탄치 않았다. 파르티아의 왕위 주장자 사나트루케스 2세가 일으킨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산발적인 저항은 계속되었다. 볼로가세스 3세는 트라야누스가 사망하기 직전인 117년경 아르메니아 남동부 일부 지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도 117년부터 반란이 잇따랐으며, 특히 유대교도들의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속주 총독이 전사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로마군은 점령지에서 크게 후퇴해야 했다.
트라야누스는 안티오케이아로 물러나 재공세를 준비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가던 중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17년 8월 9일, 킬리키아 속주의 셀리누스(가지파샤)에서 사망했다. 후계자 지명이나 유언 없이 사망하여 후계자 분쟁이 우려되었으나, 황후 폼페이아가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증언했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방침을 크게 바꾸었다. 그는 유지에 막대한 비용과 병력이 소모되는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3개 속주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파르타마스파테스를 파르티아와의 완충 지대인 오스로에네의 왕으로 임명하여 파르티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트라야누스 아래에서 파르티아 전쟁에 공을 세웠던 루키우스 퀴에투스는 이러한 동방 속주 포기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결정은 군 내부를 제외하고는 제국 내에서 큰 반발 없이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로마 제국이 트라야누스가 추진했던 광대한 동방 정복지를 유지할 여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로마 속주로서의 아르메니아는 불과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2. 2. 2. 로마의 보호국
아르탁시아드 왕조가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의 아르메니아 원정 이후 멸망하면서, 아르메니아 왕국은 로마-파르티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에서 끊임없는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 아르사케스 왕조 치하의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로마를 지지하는 파, 파르티아를 지지하는 파, 그리고 중립파로 나뉘어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종속국 또는 봉신의 역할을 자주 수행했다. 결국 비잔틴-사산 전쟁을 거치며 아르메니아는 비잔틴 아르메니아와 사산 아르메니아로 분할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는 아르메니아 속주를 유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18년, 하드리아누스는 아르메니아를 포기하고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파르타마스파테스는 곧 파르티아에게 패배하여 로마로 도망쳤고, 로마는 그에게 서부 대아르메니아의 오스로에네 지역을 공동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140년,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소아이무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161년, 아르메니아는 다시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4세에게 점령당했다. 163년,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반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 군대를 몰아내고 소아이무스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파르티아 두 제국 사이에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잦은 분쟁을 겪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강자인 사산 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산 왕조 등장 이후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지만, 아르메니아는 비록 로마의 종속국 형태였을지라도 독립을 유지하며 사산 제국에 맞서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남았다.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했을 때, 그의 군대에는 많은 아르메니아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4세기에는 아르메니아 제1군단과 아르메니아 제2군단이라는 두 개의 로마 군단이 창설되기도 했다.
3세기 후반, 황제 카루스 치하의 로마군은 사산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과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을 약탈했다. 결국 299년, 반세기 동안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 전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종속 영토로 편입되었다.
2. 3. 동로마 제국 시대
비잔틴-사산 전쟁 동안 아르메니아는 결국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비잔틴 아르메니아와 사산 아르메니아로 나뉘었다.
363년, 동로마와 사산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아르메니아를 양분했다. 페르시아는 아르메니아의 더 큰 부분("페르사르메니아")을 차지했고, 동로마는 서아르메니아의 작은 부분을 얻었다.
384년에서 390년 사이에 체결된 아킬리세네 평화 조약 (일반적으로 서기 387년으로 추정)은 카린(곧 테오도시오폴리스로 개명) 동쪽 지점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 남서쪽 지점까지 이어지는 명확한 분할선을 확정했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의 통제 지역은 늘어났지만, 옛 아르메니아 왕국의 약 5분의 4는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5]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위치하며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폰투스 관구 아래 완전한 속주(''아르메니아 I''과 ''아르메니아 II'')로 편제되었던 아르메니아 소지방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이 새로 획득한 아르메니아 영토는 다양한 수준의 자치를 유지했다. 북부의 ''아르메니아 마이오르''는 내부 자치를 유지하면서 조공을 바치고 정규 동로마 군대에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civitas stipendaria''로 구성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의 백작'(comes Armeniae|코메스 아르메니아에la)이라는 민간 총독이 통치했다.[6][7] 로마 제국 통치 하에서 멜리테네는 제12군단 ''풀미나타''의 기지였고, 4세기 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르메니아 소지방을 두 속주로 나누었다: 수도가 세바스테이아(현대 시바스)인 첫 번째 아르메니아(Armenia Prima|아르메니아 프리마la)와 수도가 멜리테네인 두 번째 아르메니아(Armenia Secunda|아르메니아 세쿤다la).[8]
한편, 298년부터 로마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남부의 사트라피 지역은 제국과 동맹을 맺은 6개의 완전 자치 공국(''civitates foederatae'')으로 구성되었다: 잉길레네, 소페네, 안치테네, 아스티아네네, 소파네네, 발라비테네.[9]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 ''나하라르''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했으며, 요청 시 병사를 제공하고 황제에게 복종의 표시로 금관을 보내는 의무만 있었다. 그 대가로 황제로부터 붉은 신발을 포함한 왕실 휘장을 받았다.[9][10]
이러한 상황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유지되었으나, 485년 사트라프들이 황제 제노(재위 474–491)에 대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진압 후, 사트라프들은 주권과 세습 권리를 박탈당하고, 세금을 납부하며 제국의 관리를 받는 ''civitates stipendariae''로 지위가 격하되었다.[9][10]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포괄적인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527년 즉위 직후, ''아르메니아 소지방''을 담당하던 ''dux Armeniae''와 '아르메니아의 백작' 직위를 폐지하고, 아르메니아 영토의 군대를 테오도시오폴리스에 주둔하는 새로운 ''magister militum per Armeniam''의 지휘 아래 통합했다.[11]
536년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 영토의 자치를 폐지하고 4개의 새로운 정규 속주를 설치하는 개혁이 시행되었다. ''아르메니아 내륙''은 ''폰투스 폴레모니아쿠스'' 및 ''아르메니아 I''의 일부와 합쳐져 새로운 속주인 ''아르메니아 I 마그나''가 되었고, 기존의 ''아르메니아 I''과 ''아르메니아 II''는 각각 ''아르메니아 II''와 ''아르메니아 III''로 재편되었으며, 옛 사트라피 지역은 새로운 ''아르메니아 IV'' 속주를 형성했다.[12] 538년,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과도한 세금에 반발하여 봉기했으나 패배하고 페르시아로 피신해야 했다.
591년, 호스로 2세와 마우리키우스 황제 사이의 조약으로 페르사르메니아의 대부분이 동로마 제국에 양도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 지역은 602–628년 비잔틴-사산 전쟁의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초기 무슬림 정복과 아르메니아의 아랍 정복이 시작되면서 아르메니아의 서부 지역만이 동로마 제국의 수중에 남아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아랍의 지배를 받았으며, 칼리프가 임명한 에미르와 지역 군주들이 번갈아 통치했다.
칼리프의 권력이 약화되고 외곽 영토가 자치 소국으로 분열되자, 동로마 제국은 10세기 초 요한네스 코르쿠아스의 원정을 통해 아르메니아 공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려 했다. 11세기 전반기, 바실리우스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의 통치 아래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직접적인 동로마 제국의 통제하에 들어왔으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모든 아르메니아 영토는 셀주크 제국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3. 기독교
기독교의 영향은 기원후 1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처음에 사도 바르톨로메오와 유다 타대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이 두 성인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사도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의 알바노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참수당했으며, 다른 기록에서는 성 베드로처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이는 아르메니아 왕 폴리미우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에 대한 보복으로, 폴리미우스의 형제 아스티아게스 왕자가 로마의 반격을 우려하여 고문과 처형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르사케스 왕조의 아르메니아 왕 중 폴리미우스라는 이름은 기록에 없으며, 현대 학계에서는 바르톨로메오가 인도 칼리안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칼리안에는 폴리미우스라는 이름의 관리가 있었다.[13][14]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301년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계몽자 그레고리가 아르메니아의 왕 티리다테스 3세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이루어졌다.
299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산 왕조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모든 아르메니아는 다시 로마의 봉신 국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로마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했고, 이는 4세기 초 니시비스를 중심으로 시리아 기독교가 확산되고 결국 아르메니아의 완전한 기독교화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 이전 아르메니아의 주요 종교는 조로아스터교(파르티아/사산 제국에 의해 장려됨)였으며, 지역 이교주의도 일부 존재했다. 성 그레고리와 그의 아들 아리스타케스는 4세기 전반에 걸쳐 아르메니아인들의 완전한 기독교화를 이끌었으며, 이는 특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 기독교를 합법화한 이후 더욱 힘을 얻었다.
아르메니아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국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개종 이후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의 제도화와 아르메니아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계몽자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위계질서를 조직했으며, 이때부터 아르메니아 교회의 수장을 ''카톨리코스''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칭호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 그레고리는 당시 아르메니아의 수도였던 바가르샤파트(현재의 에치미아진)를 "카톨리코스"의 중심지로 정하고, 301년에서 303년 사이에 아치형 바실리카 양식의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후 480년, 아르메니아의 로마 총독이었던 바한 마미코니안은 낡은 바실리카를 오늘날 아르메니아에 남아있는 십자형 교회로 재건축하도록 명령했다.
수 세기 동안 아르메니아의 정치적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했으며, 이로 인해 정치 권력은 종종 동로마 제국과 관련된 더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교회의 중심지 역시 정치 권력을 따라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니다가 13세기에 비잔틴 킬리키아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15]
4. 주교 관구
로마 속주 아르메니아 1세와 아르메니아 2세의 고대 주교 관구에 대해서는 소 아르메니아#주교 관구를 참조.
5. 주요 도시
명목상 속주도는 아르타샤트였으나, 실제 아르메니아 속주의 통치는 서쪽에 인접한 카파도키아 속주에서 이루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Vahan Kurkjian: Armenia and the Romans
https://penelope.uch[...]
[2]
서적
The Provinces of the Roman Empire
[3]
웹사이트
Legio II Armeniaca
http://www.romanarmy[...]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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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5]
간행물
2004
[6]
간행물
2004
[7]
간행물
1991
[8]
Armenian Soviet Encyclopedia
«Մալաթիա»
1981
[9]
간행물
1991
[10]
간행물
2004
[11]
간행물
2004
[12]
간행물
2004
[13]
Catholic Encyclopedia
St. Bartholomew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07-05-06
[14]
서적
The Twelve: Lives and Legends of the Apostles
https://www.amazon.c[...]
2017
[15]
웹사이트
Armenian Catholicosate
http://www.urbaniana[...]
[16]
서적
Annuario Pontificio 2013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3
[17]
서적
Trajan
[18]
서적
Rome
[19]
서적
Trajan
[20]
서적
Ancient Economy
[21]
서적
Grand Strategy
[22]
서적
Trajan
[23]
서적
Trajan
[24]
서적
Trajan
[25]
서적
Trajan
[26]
서적
Trajan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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